[유키모모] 세상은 행복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 4부 이후
* 리멤버 소재
* 유키와 모모가 꽁냥대기만 합니다
창밖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는 모모의 눈빛에는 우울함이, 깊게 내쉬는 한숨에는 아쉬움이 녹아 있다. 유키를 만난 이후로 신을 찾아본 적이 없지만, 오늘만은 신을 찾게 된다. 일기예보에서는 오늘은 밝은 거라고 했는데. 모모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바닥에 엎드렸다.
“오늘은 유키랑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한 달 전 모모는 유키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신곡 PV를 찍던 도중 벚꽃을 지는 걸 아쉬워하는 모모에게 유키가 다음 달에 꽃놀이 가자고 한 것뿐이지만. 데이트라고 딱 잘라서 얘기하지 않았어도 유키가 ‘둘이서 오붓하게 가자’라고 덧붙여줬으니 데이트가 확실하다.
둘은 먼저 데이트 날짜를 맞추기 위해 서로의 일정을 확인했다. 인기 가도를 달리는 아이돌. 블오화 4연속 우승자. 왕좌 리바레. 화려한 수식어가 많은 탓에 둘의 일정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떻게든 날짜는 맞추고 싶은 마음에 잡지, 방송 관계자 등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일정 조율이 되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5년간 쌓아 올린 신뢰와 인맥들 덕에 어떻게든 해결되었다. 남은 것은 넘치는 근성과 근성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해결했다. 유키는 힘들어했던 것 같지만. 매니저인 린토도 두 사람의 휴일 만들기에 동참해준 덕에 겨우 ‘오늘’을 만들어냈다. 린토는 겨우 하루밖에 만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지만, 모모는 유키와 함께 쉴 수 있는 것만으로 행운이라고 해주었다.
그게 마지막 행운이 될 줄이야.
모모는 비를 싫어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키를 만난 이후로 비를 싫어한 적이 없다. 비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소리도. 유리창에 부딪혀 나는 소리도. 우산 위를 통통 때리는 소리도. 경쾌하고 즐거운 소리라 좋아졌으니까.
하늘이 지상에 사는 모든 것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는 것 같아.
유키와 같이 살 때는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바람에 곤란했지만, 물받이 그릇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유키의 기타 소리와 닮아 있어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유리창에 맞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데이트를 망친 주범인걸. 어젯밤부터 불안했던 하늘은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걸 눈을 뜨자마자 봤을 때는 모모는 창밖에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걸 떨어트리고 말았다.
모모는 아쉬웠다. 유키는 가만히 서 있어도 잘생겼지만, 꽃과 함께 있으면 더, 더 잘생겼다. 신곡 PV와 앨범 홍보용 포스터를 찍기 위해 벚꽃이 가득 핀 곳에서 촬영했는데.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벚꽃잎을 맞고 있는 유키는, 비현실적이라 해도 될 만큼 잘생겼다. 이런 이케멘 내가 독점해도 되는 걸까. 생각했을 정도다.-유키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데이트를 하기로 한 5월 하순에는 벚꽃은 다 지고 없겠지만 다른 꽃들은 잔뜩 피어있을 테니까.
유키한테 안 어울리는 꽃이 있을까?
꽃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장미. 수줍음 뒤에 환한 미소를 감추고 있는 작약.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인 수국. 한결같음의 상징인 민들레.
유키라면, 어떤 꽃이든 다 어울릴 텐데.
모모는 속상하고 분한 마음에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답답하게 집 안에만 있어 좀이 쑤셔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을 위해 큰맘 먹고 산 사진기가 무용지물이 된 탓도 있을 것이다. 유키의 얼굴은 일류의 재산이라 유네스코로 지정해야 하는데. 비가 와서 속상한 마음은 어느새 유키 얼굴에 대한 주접으로 바뀌어 있었다.
“풋.”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키는 웃음소리를 냈다. 가벼운 웃음소리는 즐거움이 가득해, 모모는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오늘 데이트를 기대한 건 나뿐이야? 하지만 모모를 바라보는 유키의 얼굴에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고.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가에는 맑음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속상한 마음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씻겨 내려갔다. 모모는 바닥을 구르는 것을 멈추고 뜨거워진 얼굴을 바닥에 묻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날이 시원한데 어째서 땡볕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더울까.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맑음 인형은 만든 사람 취향 덕인지 무척 귀여웠다. 그래서 얼굴이 뜨거워진 거라고 모모는 생각했다.
유키는 잘생긴데다가 다정하고 온화하지만 그만큼 수줍음이 많아서, 모모가 그의 사랑을 온전히 알아차리기란 어려웠다. 클로버들이 잔뜩 있는 풀밭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거랑 비슷한 느낌. 어디 있을까, 한참 찾다가 네 잎 클로버를 발견했을 기분은 그 안의 고생을 날려주는 기쁨이니까.
그래. 이것도 데이트구나.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다.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노랫소리 같아졌을 때, 유키는 기타를 들고 와서는 모모 옆에 앉았다. 피크로 가볍게 기타 현을 튕기던 유키는 펙 헤드를 돌렸다. 음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펙 헤드를 두 번. 세 번, 돌리며 음을 맞추다가 할퀴듯 현을 쓸어내렸다. 맑은소리였다. 프렛을 지그시 누르며 피크를 살짝 튕겼다.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소리 같기도 했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조금 그리운 기분 마저 들어 모모는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유키가 치는 기타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기도 해봤다.
“흐흐음~ 유키~이거 신~곡~?”
모모는 마치 노래하듯 유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아니~, 비~잇방울 즉흥~곡”
유키도 마찬가지로 노래하듯 모모의 질문에 답했다. 모모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골똘히 생각하다 유키에게 물어보려 입을 열자 유키의 손가락이 현을 오르내렸다. 아까는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였다면, 이 소리는 낡은 멘션에 살 때 옆집 사람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팜 뮤트(Palm mute)다. 모모가 기타에 흥미를 보이자 이런저런 연주법이 있다고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팜 뮤트도 그중 하나였다.
유키가 팜 뮤트를 한 이유가 뭘까. 뮤트는 침묵. 그러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말을 하지 않으면 뭘 하라는 거지?
음이 다시 바뀌었다. 다시 돌아온 빗방울 소리에 모모는 자신이 시험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귀에 익지도 않은 음률에 맞춰 노래하라니. 너무 스파르타가 아닐까. 모모에게 유키는 동경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구원해 준 신, 영원한 파트너다. 연인이기도 하고. 하지만 유키는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아무리 모모라고 할지라도 봐주진 않는다. 리바레의 유키는 그런 사람이다.
이건 시험일까?
아니, 기대야.
다시 반복되는 음률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모모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 거 못 들어 봤는데. 즉흥곡이니까. 모모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즉흥곡이 그 즉흥곡일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슬며시 내려온 눈꼬리에는 짓궂은 웃음이 한가득 걸려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지금은 장난스럽게 오고 가는 말들로 노랫말을 만들었지만, 모모는 그 노랫말에 제대로 된 가사를 붙이고 싶어졌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곡이 아니라 그럴듯한 이름이 붙여진 노래로 만들고 싶어졌다.
“오늘 뭐가 먹고 싶어?”
“음... 역시 튀김일까...”
“빗소리가 튀김을 튀기는 소리 같아서?”
“엑.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렇거든.”
딩동.
현관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유키는 현관으로 가더니 손에는 커다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튀김가루와 계란, 단호박, 두부, 고구마, 잘 손질된 새우와 토막 난 닭가슴살이 들어 있었다. 배가 고팠는지 모모는 봉투 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얼른, 해줄게.”
“응!‘
즐거운 음악 시간은 끝나고 다시 돌아온 데이트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