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아침 공기에 몸을 떨었다. 잠깐 환기라도 시킬 생각이었지만 얇은 셔츠로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이겨내긴 힘들기에 창문을 닫았다. 늘 대낮에 일어나다 보니 이 시기에 아침은 춥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도 춥네. 유키의 몸에는 서늘한 기운이 몸에 남아 있었다. 몸을 따뜻하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디건이나 따뜻한 모모의 체온이나. 안타깝게도 둘 다 무리였다. 모모는 연인인 자신을 내버려 두고 꿈속의 자신과 바람을 피우는 중. 가디건은 세탁기 안에 있는 데다가, 그나마 입을 수 있는 건 방 안에 있다. 아무리 꿈속의 자신과 바람을 피우고 있어도 곤히 자는 모모를 깨우는 건 미안한 일이라 앞치마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불 앞에 있으면 따뜻해지니까, 잠기운을 날려 버릴 정도의 한기는 이겨내기로 마음먹었다.
유키는 모모가 잠자는 공주님이라고 부를 만큼 잠이 많다.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만일 유키가 아침에 눈을 뜨고 있으면 100% 확률로 날밤을 깐 것이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는 일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피식. 유키는 쌀을 씻다 말고 웃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는 유키를 모모가 보다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어?
유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 있다니, 세상이 멸망해버려.
어느 쪽일까. 유키는 모모가 꿈속의 자신과 바람 적당히 피우고 현실의 자신을 만나러 와줬으면 싶다.
씻은 쌀을 물과 함께 밥솥에 넣고 취사를 눌렀다. 손에 남아 있는 물기는 앞치마에 적당히 닦았다. 국이랑 반찬 몇 가지 만들어야겠다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얼마 전에 모모네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고 남은 장조림과 달걀, 대파, 양파 몇 개, 당근, 애호박, 표고버섯, 그리고 가공 햄이 있다. 앞서 나열한 게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들이고 나머지는 유통기한을 넘겼거나, 청경채 같은 경우는 냉장고에 너무 오래 있어서 얼었다. 청경채를 넣은 된장국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요즘 바쁘다고 장을 안 본 탓에 냉장고에 신선한 채소들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쉽다. 그래도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던 시절에 비하면 백패 천배 낫다. 그리고 주부란, 한정된 재료들로 가족의 식탁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유키가 먼저 만들기로 한 것은 된장국이다. 아침에는 국이 있어야지. 몸도 따뜻해지고, 밥을 넘기기도 편하다. 두부가 없다는 게 아쉬워도 표고버섯과 애호박이 있다. 미리 만들어둔 육수를 꺼내 냄비에 붓고 채에 된장 걸러 가며 육수에 풀자 구수한 냄새가 났다. 육수가 끓을 동안 된장국에 넣을 애호박과 버섯을 손질하면서 계란말이에 넣을 채소도 같이 손질했다. 양파를 써는데 열중한 나머지 국이 넘칠 뻔했으나, 냄비는 둘째치더라도 국이 안 타서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계란말이를 하고 남은 달걀물을 햄을 입혀 프라이팬에 올렸다. 가공 햄은 인공색소나,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탓에 어지간하면 모모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먹일 수 있는 고기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고기는 냉동실에 있는 탓에 해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전날 밤에 고기를 꺼내 놓을 걸 후회가 되는 유키였다.
구운 햄을 접시에 담고 적당히 식은 계란말이를 썰어 마찬가지로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두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간단한 아침 식사 차려졌다. 방금 올린 햄구이와 계란말이 외에 절인 채소, 장조림, 수저와 젓가락 두 쌍. 비워진 밥공기와 국그릇이 각각 두 개씩 있지만, 된장국은 다 끓었고, 밥이 다 되길 기다리면 된다.
“하아아암.. 맛있는 냄......... 엑 유키이?!”
“모모, 멀쩡한 사람을 보고 비명 지르지 말아 줘”
“하지만, 유키가 이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드문...?”
이불에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모모가 돌연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잠깐. 유키가 말릴 사이도 없이도 없이 모모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파파라치에게 찍히면 어쩌려고. 유키는 새된 비명을 질러댄 이유는 스캔들보다 모모의 알몸이 찍히는 게 더 걱정되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람이 거실에 들어 왔다. 높은 건물 사이로 주홍빛 구체가 걸려 있었다. 모모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줄 알았는데. 푸핫. 그 말에 유키의 웃음 버튼이 눌러지고 말았다. 배를 쥐고 한참 웃는 유키를 향해 모모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웃긴 부분이 어디 있어????”
유키는 그 말에 고개만 내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모짱 삐진다. 볼을 한껏 부풀리는 모모가 귀여워서 또 웃었다. 이번엔 진짜 모모 탓이야.
밥이 다 될 동안 기다려 달라고 하자 모모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유키는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옷을 입으라고 했지만, TV에 보고 싶은 방송이 있다며 그걸 보고 입겠다고 했다. 대체 뭘 보려고. 유키는 팔짱을 끼며 시선을 TV 브라운관에 고정했다.
- 안녕하세요, 유키입니다.
- 안녕하세요. 오쿠도....
“오늘도 이케멘!”
허. 헛웃음이 나왔다. 보고 싶다는 게 이거? 유키는 어처구니가 없다. TBO의 아침 방송인 ‘좋은 아침입니다’에서 새로 하는 드라마에 대해 짧은 인터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 방송에 나오는지는, 인터뷰를 했었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유키는 모모가 저걸 어떻게 알았는지보단 눈앞에 자신을 두고 TV 안에 자신을 보고 헤벌쭉~ 하면서 얼굴이 풀어져 있는 모모가 영 못마땅했다. 아까까지 꿈속의 자신과 바람을 피웠으면서 이젠 TV 속 자신과 바람을 피우다니. 너무하다, 이거다.
유키는 모모 옆에 앉았다. 이불이 얇아서 그런지, 모모의 체온이 유키에게 쉽게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자신을 봐주지 않은 것에 대한 질투심과 따뜻한 모모의 체온 때문에 ‘불끈’ 하신다는 얘기다. 유키는 모모의 눈을 가리고 소파에 몸을 쓰러트렸다. 바람피우는 거야? 귓가에 속삭이자 아래에 깔려 있던 모모는 몸을 떨었다. 짧은 침묵으로도 숨길 수 없는 열기 토해내며 모모가 답했다.
“그런 적 없어.”
“했어.”
“아냐!”
“지금 나 안 보고 저기에 한눈팔았잖아.”
모모는 그 말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없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 이제까지 혼자 뒀잖아. 이건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알 수 없는 기분마저 들어 눈을 가리고 있는 유키의 손을 치우자 입술이 다가왔다. 모모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나 아직 양치 안 했는데!
“이젠 키스까지 피해?”
“모모짱, 아직 양치 안 했어!.”
“그게 뭐.”
“유키한테 입 냄새 풍기는 거 싫단 말야!!!!!!”
그 말에 유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고 있냐.’다. 유키는 얼굴은 잘생겼지만 섬세함은 부족했다. 이 경우는 욕망에 솔직한 쪽이 맞지만. 유키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유키가 모모에게 준 것은 알약같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종류의 사탕이었다. 별일이다 싶었다. 단 거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사탕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모도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의문점은 더 커졌다. 그런데, 사탕은 왜 준 거지? 그 의문의 답은 쉽게 풀렸다. 모모가 사탕을 받고 가만히 있자 유키는 포장지를 뜯어 모모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사탕은 달콤했고, 뭔가 익숙한 맛이었다. 복숭아? 살짝 사과 맛도 나는 것도 같고. 모모가 입맛을 다시자 유키가 급습을 시도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잠깐... 기다릴 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유키는 모모가 소파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아니면 도망치는 걸 막기 위해 품 안에 가뒀다. 인사처럼 가볍게 이어져야 할 모닝 키스에는 노골적인 성적 의도가 담겨 있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사탕의 맛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진득한 키스는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 잊게 할 정도다. 베란다 창문들 통해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모모의 머리 위에 닿지 않았다면 휩쓸리고 말았겠지만.
“유키, 지금 아침..이야.”
“그런 건 상관없잖아.”
아침이든 낮이든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있는데. 같은 말은 목구멍 아래에 남겨둔다. 부끄럽기도 했고,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확실해서다. 덮고 있는 이불을 벗겨 내자 모모가 비명을 질러댄다. 달링 변태! 모모의 항의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보는 것과 아침 햇살 아래에서 보는 모모의 모습은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다. 누르스름한 불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복숭앗빛 뺨이나 목 아래로 남겨져 있는 밤의 흔적들이 붉어 잠들어 있는 감각을 두들겨 깨운다. 가벼운 불장난에 화상을 입어버린 것처럼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벗겨 낸 이불을 머리 위에 덮어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막았다. 이제, 밤이지? 그러나 얇은 이불로는 아침햇살은 가릴 수 없었다. 인간인 그로서는 밤을 가져올 수 없으니, 유키 나름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모는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궤변이라는 걸 알아도 유키의 얼굴이 곧 설득력이기에, 홀라당 넘어 가버리고 만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유키는 자기 얼굴이 잘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반한 얼굴 덕에 드라마나 영화 주역도 쉽게 꿰찰 수 있고 모모를 흔들고, 홀릴 수 있다. 살짝 웃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쉽게 넘어오고 마는 모모의 이성을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모모. 다정함을 담은 목소리에는 아까 했던 키스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삐이이이이익.
꼬르륵.
열기는 모모의 배에서 난 소리 때문에 밥솥에서 나오는 김처럼 새고 말았다. 모모는 제 배에서 난 소리 때문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그래봤자 귀는 물론이고 가을에 나는 사과인 홍옥보다 붉어진 몸은 가리지 못했다. 밤은 제멋대로여도 아침은 모모의 자상한 애인으로 돌아온 유키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머리에 쓰고 있었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뜸 들일 동안 얼른 옷 입고와. 모모는 말없이 고개만 세차게 흔들었다.
“맛있어~!”
“고마워.”
유키가 요리하는 게 즐거워진 건 순전히 모모 덕이다. 잘 먹어주는 건 물론이거니와 맛있다고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좋았다. 보는 사람이 되레 행복할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만지면 쫀득한 느낌이 날 듯한 뺨이 생기로 가득 찬 것도 보기 좋았다. 유키는 모모의 뺨을 쿡쿡 찔러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게 썬 당근과 대파가 들어가 알록달록한 계란말이를 모모 앞으로 밀었다. 많이 먹어. 오후에 촬영 있잖아. 응. 모모의 환한 미소에 유키는 자신이 먹고 있는 게 밥인지, 행복인지 모를 지경이라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모모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유키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무심코 집어 든 계란말이는 유키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맛있었다. 전염된 탓일까. 입 안에서 부서지는 계란말이를 꼭꼭 씹어 삼켰다.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은 된장국이나 절임 채소를 제외하면 유키가 좋아하는 반찬은 없다. 애초에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던가. 음식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모모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였기 때문에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절임 채소를 먹으면서도, 유키가 생각하는 건, 어떻게 하면 모모의 살이 찔까, 였다. 매번 술자리에 가면 술배라도 있어야 하는데, 없다. 열심히 먹인다고 자부했건만, 모모의 뱃살은 군살 하나 없이 단단했다.
그래서 유키는, 유키답지 않게, 충동적인 말을 내뱉고 말았다.
“같이 살까?”
“에, 같이 사는 건 좀 무리지 않아?”
아무리 충동적으로 말했어도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말이다. 유키는 차인 충격으로 인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가운데, 그 얼굴을 보고 있는 모모는 착각하고 말았다. 유키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중국에서 유명한 미인인 서시는 얼굴을 찌푸려도 아름다워 남이 따라 할 정도라고 했던가. 유키의 찌푸린 얼굴은 감히 따라 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위압감을 느낀 모모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유키를 이해 시킬만한 말들을 생각했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음식을 물과 함께 삼켰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모모 자신과 관련된 말이 아닌, 타인과 관련된 말들뿐 이었다.
기삿거리가 없으면 리바레 거처에 잠복해서 기사를 만들어가는 기자들. 잊을만하면 오피스텔 근처에서 서성이는 사생팬들과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
화를 가라앉히기 위한 변명은 오히려 유키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결정적인 거절 사유를 말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화난 얼굴도 이케멘~ 같은 말은 할 수도 없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일과 관련된 전화라 모모는 슬쩍 유키의 눈치를 보았다. 유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깊은 바닷속을 담은 눈동자는 그저 고요할 뿐. 그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모모는 잘 알고 있다. 미안. 식사 도중에 자리를 뜨는 것에 대한 사과였다. 응. 오카링. 모모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매니저인 오카자키 린토였다. 전화한 이유는 촬영장 사정으로 스케줄이 한 시간이 앞당겨졌는데 여기에 맞춰 줄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함이었다. 모모는 오늘 일과를 찬찬히 떠올렸다. 잡지 촬영 두 건과 CF 포스터 촬영 하나와 여성지 인터뷰, 밤에 음악 방송 출연, 총 5개다. 린토가 말한 건 오늘 첫 스케줄로 본래라면 11시에 있을 잡지 촬영, 지금 시간은 8시로 여유가 있다 못해 넘친다. 모모는 그러겠다고 하자 린토가 사과했다. 괜찮아. 오카링이 사과할 일이 아닌걸. 헤실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뒤 모모는 린토와 몇 마디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같이 밥을 먹는 도중에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서 미안하다는 사과에 유키는 헛웃음이 나왔다. 모모가 한, 두 번의 사과에는 프러포즈 거절에 대한 건 없었기 때문이다. 통화가 길어진 탓에 촉촉했던 밥이 식어서 고슬고슬하고, 된장국에 풀어진 된장이 분리되고 있음에도 모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모모는 뭐든 다 잘 먹어서 엉망진창으로 구워진 달걀부침이 올라간 밥도 맛있게 먹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모모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같아도,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뭐든지 해줄 수 있는데, 식어서 맛이 없어진 음식 따위를 먹이긴 싫었다. 그러나 유키가 다시 데워주겠다고 말했음에도 모모가 “번거롭잖아. 아주 맛있는걸.” 하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고 밥을 씹어 삼켰다. 식은 계란말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유키가 밥을 깨작깨작하며 먹는 사이 모모는 밥은 물론이고 된장국마저 말끔하게 비웠다. 반찬으로 만들었던 장조림과 햄구이, 계란말이도. 모모는 비워진 그릇과 유키를 번갈아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너무 많이 먹어버렸네. 식탁에 남은 것은 유키 몫의 밥과 된장국, 그리고 절임 채소 뿐이기에.
“잘 먹었습니다!”
잘 먹어서 기분이 좋아졌다는 의미를 담은 미소에 유키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식사를 끝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일어날게. 이번에도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모모라면 유키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줬겠지만, 오늘은 스케줄이 한 시간이나 당겨지는 바람에 유키는 혼자 먹을 수밖에 없었다. 모모는 식기를 싱크대에 담그고는 욕실로 향했다. 탕. 욕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유키의 입에서는 한숨이 쏟아냈다. 밥 한 숟갈과 시큼한 맛이 나는 절임 채소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남은 비린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안 거야.......”
***
유키는 반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짜다. 상담을 빙자한 하소연을 하면서 반이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반이 말한 대로 성의가 없는 프러포즈를 한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는 거 안다. 하지만 이럴 때는 차인 것에 대한 위로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10년은 알고 지낸 절친으로서. 유키는 서러움을 토로했지만 반은 다른 건 몰라도 유키의 인간성에 대한 평가는 박했던지라, 위로는 무슨. 유키는 말문이 막혔다. 이어서 한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한 대 안 맞아서 다행이라든가. 분에 넘치는 줄도 모른다든가. 자업자득이다든가. 모모가 아깝다든가.
“알아.”
절친한 친우의 이어지는 폭언에 유키는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모모의 칭찬에 금방 수긍한다.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말이었으나, 모모가 좋은 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 중의 한 명인 반이 좋은 아이라고 인정해줬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다. 그런 유키의 오로라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탓에 반은 노골적인 기분 나빠했다. 절친에게 너무 한 거 아냐? 하-나도 안 너무해. 바빠 죽겠는데 연애 상담이나 하는 네가 더 나빠. 유키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있는지. 바쁘다고 불평하면서도 반은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소고와 타마키 목소리가 들리는 걸 봐선 멧조 매니저 일을 하고 있어 바쁠 텐데도. 유키는 반이 좋은 사람들 곁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타마키의 칭얼거림과 그걸 말리는 소고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서늘하다.
반, 그때와 똑같아. 모모는 내 마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항상 ‘끝’만 생각하고 있어. 난 그게 서운해.